
필요한 만큼만 처방하려는 이유
“원장님, 정신과에 한번 다니기 시작하면 약을 계속 먹어야 하나요?” “약이 하나씩 늘어나다 보면 결국 평생 먹게 되는 건 아닐까요?”
정신건강의학과 진료를 처음 시작하는 분들에게 생각보다 자주 듣는 질문입니다.
이미 다른 질환으로 여러 약을 복용하고 있는 분들은 약이 하나 더 추가되는 것 자체를 부담스럽게 느끼기도 하고, 수면제나 정신과 약을 오래 복용하게 될까 걱정해 치료를 미루기도 합니다.
저는 이런 걱정이 충분히 이해됩니다.
약은 분명 중요한 치료 도구이지만, 약을 많이 쓰는 것 자체가 치료의 목표가 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꼭 필요한 약을 무조건 피하는 것 역시 좋은 치료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한 가지입니다.
지금 이 환자에게 어떤 치료가 필요한지 판단하고, 약이 필요하다면 필요한 만큼 사용하며, 그렇지 않은 부분은 다른 방법으로 해결할 수 있는지 함께 살펴보는 것.
제가 진료하면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원칙도 여기에 있습니다.
저 역시 처음에는 ‘약’에 매력을 느껴 정신과 의사가 됐습니다
처음 정신건강의학과에 관심을 갖게 되었을 때 저는 약물치료에 상당한 매력을 느꼈습니다.
작은 알약 하나가 뇌의 신경전달물질에 영향을 주고, 심한 우울이나 불안, 불면, 환청과 망상 같은 증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사실이 무척 흥미로웠습니다.
하지만 전공의 생활을 하면서 생각은 조금씩 달라졌습니다.
아무리 약을 세심하게 조정하고 긴 시간 면담을 해도 쉽게 좋아지지 않는 환자분들이 있었습니다. 정신질환은 제가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복잡했고, 약물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많다는 사실도 배웠습니다.
그렇다고 약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진료 경험이 쌓일수록 약을 언제 써야 하고, 언제 기다려야 하며, 언제 줄여야 하는지를 판단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더 강해졌습니다.
증상과 진단에 맞는 약을 적절한 시점에 사용하면 치료의 방향을 크게 바꾸는 경우도 분명히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약을 쓰지 않는 진료’를 목표로 하지 않습니다.
대신 약이 정말 필요한지 한 번 더 생각해보는 진료를 하려고 합니다.
정신과 약은 적을수록 좋은 걸까요?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중증 우울증이나 조울병, 조현병처럼 충분한 약물치료가 매우 중요한 질환도 있고, 심한 불안이나 불면 때문에 일상생활 자체가 어려운 시기에는 약물이 회복을 시작하는 데 큰 도움이 되기도 합니다.
반대로 증상이 상당히 안정됐는데도 과거에 추가된 약이 오랫동안 그대로 남아 있거나, 서로 비슷한 역할을 하는 약이 여러 개 겹쳐 있는 경우에는 다시 한번 처방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진료실에서는 새로운 약을 추가하기 전에 가능하면 이런 질문을 먼저 해봅니다.
지금 가장 힘든 증상은 무엇인가?
현재 복용 중인 약 가운데 아직 필요한 약은 무엇인가?
생활습관이나 수면리듬을 조정하면 개선할 수 있는 부분은 없는가?
인지행동치료나 다른 비약물 치료가 도움이 될 수 있는가?
그리고 약을 사용하게 되더라도 치료 반응과 부작용을 보면서 유지할 것인지, 조절할 것인지, 장기적으로 줄여볼 수 있는지를 계속 판단합니다.
실제 처방 데이터를 한번 확인해봤습니다
이런 진료 방향이 제 생각에만 머물러 있는지 궁금해 최근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서 제공한 약제급여 적정성 평가 결과도 확인해봤습니다.
심평원의 약제급여 적정성 평가는 외래 처방을 대상으로 처방 건당 약품목수와 6품목 이상 처방비율 등 여러 지표를 평가하는 제도입니다. 최근 공개된 2024년 평가에서도 전체 의료기관의 처방 건당 약품목수 등을 지속적으로 분석하고 있습니다.
저희 의료기관에 제공된 평가 결과에서는 다음과 같은 경향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 처방 건당 약품목 수 : 전체 평균과 동일 종별 평균보다 낮게 나타났습니다.
- 6품목 이상 처방 비율 : 전체 평균과 동일 종별 평균보다 낮게 나타났습니다.
- 노인주의 의약품 처방률 : 전체 의원 평균보다는 높았지만, 동일 종별 평균보다는 낮게 나타났습니다.
이 결과만으로 좋은 진료와 나쁜 진료를 나눌 수는 없습니다.
환자의 나이와 진단, 증상의 심각도, 동반질환에 따라 필요한 약의 종류와 개수는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여러 약이 꼭 필요한 환자에게 단순히 약의 개수를 줄이는 것은 오히려 적절한 치료가 아닐 수 있습니다.
다만 개인적으로는 “필요하지 않은 약을 습관적으로 추가하지 말자”는 제가 평소 생각해온 방향이 실제 처방 데이터에도 어느 정도 반영되어 있는지 점검해볼 수 있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습니다.
약 말고 다른 방법도 함께 생각합니다
특히 불면증을 진료하다 보면 약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만성 불면증에서는 수면제의 종류를 계속 바꾸는 것보다 불면증 인지행동치료(CBT-I)가 중요한 경우가 있습니다.
낮과 밤의 생활패턴이 흐트러져 있다면 기상시간과 낮잠, 침대에 머무는 시간부터 조절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우울증에서는 약물치료와 함께 심리치료가 도움이 될 수 있고, 적절한 환자에서는 경두개 자기자극술(TMS) 같은 비약물 치료를 고려할 수도 있습니다.
수면무호흡증이라면 문제는 더욱 다릅니다.
수면무호흡 때문에 밤마다 반복해서 깨고 낮 동안 피곤한데 이를 불면증이라고 생각해 수면제만 추가한다면, 치료의 초점이 잘못될 수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필요한 평가를 통해 수면무호흡 자체를 확인하고 치료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즉, 제가 생각하는 치료는 하나의 방법을 고집하는 것이 아닙니다.
약물, 생활습관 조절, 인지행동치료, 심리치료, 비약물 치료, 그리고 필요한 경우 수면검사와 수면질환 치료를 환자의 상태에 맞게 조합하는 것에 가깝습니다.
이를 조금 어려운 표현으로는 ‘멀티모달(multimodal) 치료’라고 부를 수 있지만, 결국 뜻은 간단합니다.
한 가지 도구만 가지고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 않는 것입니다.
약을 줄이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필요한 만큼’ 쓰는 것입니다
환자분들께서
“약을 최대한 적게 먹고 싶어요.”
라고 말씀하시면 저도 그 마음을 존중합니다.
하지만 때로는 약을 줄이는 것이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되는 시기도 있습니다.
증상이 심할 때 충분한 치료를 하지 않으면 회복이 늦어질 수 있고, 스스로 약을 갑자기 줄이거나 중단하면 오히려 불면이나 불안이 악화되거나 금단 증상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생각하는 좋은 처방은 단순히 ‘적은 약’이 아닙니다.
필요한 곳에는 충분히 사용하고, 필요가 줄어들면 다시 조정하는 처방입니다.
새로운 약을 추가할 때는 왜 필요한지 설명하고, 기존 약을 계속 복용할 이유가 있는지도 함께 살펴보며, 약이 아닌 다른 치료가 도움이 된다면 그것도 선택지에 포함시키는 방식입니다.
지금 복용하고 있는 약이 부담스럽다면
여러 약을 오래 복용하다 보면 누구나 한번쯤 “이 약들을 언제까지 먹어야 하지?” 라는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그럴 때는 혼자 판단해서 갑자기 줄이거나 중단하기보다, 현재 각각의 약이 왜 처방되어 있는지부터 한번 정리해보는 것이 좋습니다.
어떤 약은 아직 꼭 필요할 수 있고, 어떤 약은 상태가 좋아지면서 조절할 여지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또 약을 줄이는 대신 생활습관이나 수면리듬, 인지행동치료 같은 다른 방법을 함께 사용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저는 진료실에서 환자분께서 “약을 먹는 것이 부담스럽습니다.” 라고 솔직하게 말씀해주시는 것을 오히려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 걱정까지 포함해서 치료 방법을 결정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정신건강의학과 치료의 목표는 약을 많이 쓰거나 적게 쓰는 것이 아니라,
환자가 다시 안정적인 일상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필요한 치료를 가장 적절하게 선택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본 글은 일반적인 의학정보를 제공하기 위한 내용이며, 복용 중인 정신과 약물이나 수면제는 의료진과 상의 없이 임의로 감량하거나 중단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김재하 원장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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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네이버 블로그 원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