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지행동치료(CBT-I)와 디지털 치료제가 주목받는 이유
불면증으로 진료를 받으러 오시는 분들께
“지금까지 불면증 인지행동치료를 받아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라고 여쭤보면 대부분 고개를 저으십니다.
수면제를 몇 년째 복용하고 있는 분도 CBT-I라는 이름 자체를 처음 들어보셨다고 말씀하시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조금 의아한 일입니다.
국내외 주요 불면증 진료지침에서 인지행동치료(CBT-I, Cognitive Behavioral Therapy for Insomnia)는 만성 불면증에서 가장 먼저 고려해야 할 핵심 치료로 자리 잡은 지 오래됐기 때문입니다.
미국수면의학회(AASM)는 다요소 인지행동치료(CBT-I)를 강하게 권고하고 있고, 미국내과학회(ACP) 역시 성인 만성 불면증의 초기 치료로 인지행동치료 (CBT-I)를 권고합니다. 2023년 개정된 유럽 불면증 가이드라인에서도 CBT-I는 여전히 1차 치료의 중심에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 진료실에서는 왜 이렇게 만나기 어려웠을까요?
좋은 치료인데, 왜 실제로 받아본 사람은 적을까요?
인지행동치료(CBT-I)는 효과가 충분히 검증된 치료지만 현실적인 문제가 있었습니다.
전통적인 인지행동치료(CBT-I)는 단순히 몇 가지 수면 습관을 설명하는 것으로 끝나는 치료가 아닙니다. 환자의 수면일지를 분석하고, 침대에 머무는 시간을 조절하며, 수면에 대한 잘못된 생각과 행동을 반복적으로 교정해야 합니다.
따라서 의료진의 시간과 환자의 꾸준한 참여가 모두 필요합니다.
하지만 국내 의료현장에서 이런 치료를 충분한 시간 동안 제공하기에는 현실적인 제약이 있었고, 반대로 비급여 형태의 전문적인 치료를 이용하려면 환자 입장에서는 비용과 접근성의 장벽이 생깁니다.
결국 가이드라인에서 권하는 치료와 실제 진료실에서 제공되는 치료 사이에 상당한 간극이 생겨왔습니다.
이 간극을 줄이기 위해 등장한 방법 중 하나가 디지털 치료기기(DTx)입니다.
스마트폰이나 디지털 기기를 이용해 인지행동치료(CBT-I)의 표준화된 치료과정을 제공함으로써, 환자가 병원 밖에서도 치료를 이어갈 수 있도록 하는 방식입니다. 국내에서도 2023년 불면증 치료용 디지털치료기기가 처음 식품의약품안전처 허가를 받으면서 이러한 치료가 본격적으로 제도권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저 역시 최근에는 진료 현장에서 이러한 디지털 인지행동치료(CBT-I)를 활용하고 있으며, 얼마 전에는 ‘청년의사’ 유튜브에서도 불면증 디지털치료의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인지행동치료(CBT-I)는 무엇을 바꾸는 치료일까요?
인지행동치료라는 이름을 들으면 상당히 복잡한 심리치료를 떠올리는 분들이 많습니다.
인지행동치료의 기본적인 생각은 비교적 명확합니다.
우리의 감정과 행동에는 생각이 영향을 주고, 잘못된 생각과 행동의 패턴을 찾아 교정하면 증상을 줄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치료 체계는 1960년대 정신과 의사 아론 벡(Aaron Beck)의 연구를 중심으로 발전했고, 이후 우울증과 불안장애를 비롯한 여러 정신건강 영역에서 폭넓게 사용되어 왔습니다. 불면증에 적용되는 인지행동치료(CBT-I)는 이 원리를 수면에 맞게 구조화한 치료입니다.
그리고 흥미롭게도 불면증에서는 반복되는 문제가 비교적 명확한 경우가 많습니다.
대표적인 생각은 이런 것입니다.
“오늘도 못 자면 내일 하루를 완전히 망칠 거야.”
잠에 대한 걱정이 커질수록, 사람은 잠을 더 열심히 자려고 합니다.
평소보다 일찍 침대에 눕고, 잠이 오지 않아도 계속 누워 있으며, 전날 부족한 잠을 보충하기 위해 낮잠을 자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런 노력들이 역설적으로 밤의 수면 압력을 떨어뜨립니다.
침대에서는 잠보다 걱정을 더 많이 하게 되고,
침대 = 잠자는 곳 이어야 했던 관계가,
침대 = 잠이 올지 걱정하며 버티는 곳 으로 바뀌기도 합니다.
결국 불면증에서는 잠을 잘 자려고 지나치게 노력하는 행동 자체가 오히려 잠을 방해하는 상황이 만들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인지행동치료(CBT-I)는 ‘더 자려고 노력하는 치료’가 아닙니다
인지행동치료(CBT-I)에서 중요한 치료 중 하나가 수면시간 조절(sleep restriction 또는 sleep compression)입니다.
예를 들어 실제로는 밤에 5시간 정도 자는데 불안한 마음에 침대에서 9시간을 보내고 있다면, 침대에 누워 있는 시간을 실제 수면시간에 좀 더 가깝게 조절합니다. 처음에는 직관에 반하는 방법처럼 느껴집니다.
“잠이 부족한데 오히려 침대에 있는 시간을 줄이라고요?”
하지만 목적은 잠을 빼앗는 것이 아닙니다.
침대에서 깨어 있는 시간을 줄이고 수면 압력을 충분히 만들어, 다시 ‘누우면 잠드는 경험’을 회복시키는 것입니다.
여기에 자극조절, 인지치료, 이완기법과 수면에 대한 교육 등을 함께 적용합니다.
그래서 제대로 시행된 인지행동치료(CBT-I)는 단순한 ‘수면위생 교육’과는 상당히 다릅니다.
왜 불면증은 디지털 치료와 궁합이 좋을까요?
인지행동치료(CBT-I)는 비교적 구조화하기 좋은 치료입니다.
환자는 매일
- 언제 침대에 들어갔는지
- 실제로 언제 잠들었는지
- 밤에 얼마나 깨어 있었는지
- 몇 시에 일어났는지
- 낮잠을 잤는지
등을 기록합니다.
이를 바탕으로 수면 효율을 계산하고 다음 주의 취침시간과 기상시간을 조절합니다.
즉, 기록 → 분석 → 행동조절 → 다시 기록 이라는 반복적인 구조가 있습니다.
이런 특성 때문에 CBT-I는 다른 심리치료보다 비교적 일찍 디지털화가 진행됐습니다.
대표적으로 영국에서 개발된 Sleepio 같은 디지털 인지행동치료(CBT-I) 프로그램은 여러 무작위 임상시험을 통해 연구되어 왔고, 2023년 유럽 불면증 가이드라인에서도 디지털 방식의 인지행동치료(CBT-I)가 중요한 치료 전달 방식으로 다뤄지고 있습니다.
국내에서도 2023년 불면증 치료용 소프트웨어가 최초의 디지털치료기기로 식약처 허가를 받았습니다.
이런 변화는 기존에는 시간과 비용 때문에 인지행동치료(CBT-I)에 접근하기 어려웠던 환자들에게 새로운 선택지를 열어줄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하지만 앱만 처방한다고 치료가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저도 처음 디지털 인지행동치료(CBT-I)를 진료에 적용할 때는 한 가지 기대가 있었습니다.
표준화된 프로그램이 잘 만들어져 있다면, 환자가 앱의 안내를 따라가면서 치료를 상당 부분 스스로 진행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실제 진료를 해보니 절반은 맞고 절반은 달랐습니다.
인지행동치료(CBT-I)의 원리는 비교적 단순하지만 실행하는 과정은 생각보다 쉽지 않습니다.
특히 초반에는 침대에 머무는 시간을 줄이면서 평소보다 피곤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이때 환자분들은 자연스럽게
“오늘 너무 피곤한데 조금 일찍 자면 안 될까요?” “주말이니까 늦잠을 자면 안 될까요?”
라고 묻게 됩니다.
바로 이 순간에 치료를 포기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저는 디지털 치료를 사용하더라도 진료실에서 의료진이 치료 과정을 함께 살펴보는 역할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수면일지를 함께 보고, 힘든 부분을 조정하고, 왜 지금 이 과정을 버텨야 하는지 설명하면서 치료를 끝까지 따라갈 수 있도록 돕는 것입니다.
디지털 치료기기가 치료의 구조를 제공한다면, 의료진은 그 과정을 함께 뛰어가는 페이스메이커 에 가깝습니다.
저 역시 잠을 못 자는 밤을 경험했습니다
얼마 전 저 역시 스트레스가 심한 시기에 며칠 동안 잠을 설친 적이 있었습니다.
침대에 누워 있는데 시간이 계속 지나고,
“내일 진료가 있는데 이렇게 못 자도 괜찮을까?”
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그 순간 평소 불면증 환자분들이 말씀하시던 불안이 어떤 느낌인지 훨씬 생생하게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잠을 자야 한다고 생각할수록 잠은 더 멀어졌습니다.
다만 저는 인지행동치료(CBT-I)의 원칙을 알고 있었습니다.
전날 잠을 설쳤다고 평소보다 일찍 침대에 들어가지 않았고, 피곤하다고 낮잠으로 부족한 잠을 모두 보충하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불안하더라도 기존의 수면 리듬을 크게 흔들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그러자 며칠 뒤 수면은 다시 자연스럽게 돌아오기 시작했습니다.
이 경험을 하면서 다시 한번 느꼈습니다.
인지행동치료(CBT-I)의 목표는 억지로 잠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잠을 너무 많이 통제하려고 하면서 무너뜨린 자연스러운 수면의 원리를, 다시 회복하는 과정에 가깝습니다.
“약 없이 버티는 치료”가 아니라, 잠드는 힘을 다시 만드는 치료
불면증 인지행동치료를 “수면제를 먹지 않고 참는 방법” 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필요한 경우에는 약물치료를 함께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수면제 한 알이 그날 밤의 잠을 만들어주는 것과 별개로, 장기적으로 스스로 잠드는 능력을 회복할 수 있도록 치료하는 것입니다.
인지행동치료(CBT-I)는 효과가 좋은 만큼 환자에게 일정한 노력도 요구합니다. 특히 치료 초반에는 피곤하고 불편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왜 이런 과정을 거치는지 이해하고, 치료 경과를 의료진과 함께 확인하면서 조금씩 조정해간다면 그 과정은 훨씬 수월해질 수 있습니다.
저는 앞으로도 약물치료와 인지행동치료(CBT-I), 그리고 디지털 치료기기를 어느 하나의 정답으로 정해놓기보다 각 환자의 불면증이 어떤 형태인지에 따라 적절히 조합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불면증 치료의 목표는 단순히 오늘 밤 잠드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잠을 지나치게 의식하지 않고도 자연스럽게 잠들 수 있는 상태를 회복하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 본 글은 일반적인 의학정보를 제공하기 위한 글이며, 불면증 치료 방법은 개인의 증상과 동반 질환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김재하 원장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 인천광역시 남동구 인주대로 582 신현프라자 6층
인천지하철 1호선 예술회관역 3번 출구 앞
참고자료
- American Academy of Sleep Medicine. Behavioral and psychological treatments for chronic insomnia disorder in adults. 2021.
- American College of Physicians. Management of Chronic Insomnia Disorder in Adults. 2016.
- Riemann D, et al. The European Insomnia Guideline: an update on the diagnosis and treatment of insomnia 2023.
- 식품의약품안전처. 국내 최초 디지털치료기기 Somzz 허가,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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